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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다 히로키 / 돈보다 의리를 지킨 사나이

by έτυμος 2020. 7. 28.

안녕하세요? '나의 이야기' 입니다. 

프로야구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목표가 무엇일까요? 아마도 높은 연봉일 것입니다. 프로야구 선수에겐 당연한 목표일 수 있겠지만, 고액의 연봉이면 친정팀을 버린채 라이벌 팀으로도 무작정 떠나는 선수들을 볼때마다 감동과 스토리가 없는 자본주의의 잠식한 스포츠 세계의 씁쓸함을 느끼곤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자신을 키워준 팀 <히로시마>를 떠나면서 팬들에게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매이저리그로 떠났다가, 큰 성공을 거두고, 수많은 팀의 거액의 러브콜을 단호히 거절한 채,

<히로시마>의 팬들 곁으로 돌아온, 일본 역사상 최고의 의리파 야구선수라고 불리우는 히로시마의 심장 '구로다 히로키'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아래를 통해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구로다 히로키는 1975년 2월 10일 오사카에서 태어났습니다. 구로다의 아버지, '구로다 카즈히로'는 난카이 호크스에서 프로 생활을 했고, 은퇴후 오사카에서 스포츠 용품점을 운영하면서, 구로다 히로키를 키우게 됩니다. 

둘째 아들 구로다 히로키가 야구에 소질이 있는 것을 알게 되자, 아버지 카즈히로는 구로다를 프로 선수로 키우기 위해서 엄격하게 구로다를 가르치게 됩니다.

보통이런 경우, 엄한 아버지를 피할 인자한 어머니가 있는 경우가 많은데, 투포환 선수로 뛰었던, 어머니 야스코는 아버지 못지 않게 엄격한 분이셨습니다. 

그렇게 엄한 부모님의 하드 트레이닝 속에서 강한 멘탈과 체력을 키운 구로다였지만, 지금과는 달리 마른 체격에 폭발적인 투구를 하지 못하면서, 고교 무대를 평정했던 다른 특급 선수들과 달리 특별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였습니다. 

구로다는 고교졸업 후 고향 오사카를 벗어나, 도쿄 센슈대학에 진학하는 강수를 두면서, 프로진출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도쿄 센슈 대학 입학은 구로다의 프로진출에 신의 한 수가 되었습니다. 센슈대학은 엘리트 대학리그로 불리는 도쿄 6대학리그가 아닌, 도토 대학리그 소속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스카우트들에게 구로다 자신을 홍보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습니다. 

거기에 대학시절 그로다의 구속이 150km까지 나오게 되면서, 당연하게도 스카우트들의 눈을 사로잡기 시작했고, 그중에서도 무명 시절부터 오래도록 구로다를 지켜보고 관심을 준 히로시마는 1996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구로다를 2라운드에 지명합니다. 그렇게 구로다와 히로시마의 뜨거운 인연은 시작되게 됩니다. 

구로다는 1997년 4월 25일 아버지의 숙적 요미우리와의 선발 데뷔전을 갖게 되었고, 9이닝 1실점 완투승이라는 놀라운 투구를 보이면서 자신을 믿고 지명해준 히로시마에 구단 역대 4번째 데뷔전 완투승 투수로 보답을 합니다. 

그러나 구로다는 그 이후 불안한 제구력으로 6승 9패 ERA 4.40을 기록하는데 그치면서, 생애 한 번 뿐인 신인 왕을 놓치게 됩니다. 구로다는 4년간 특별한 반등 없이 ERA 6점대의 그저 그런 성적을 내게 됩니다. 

그러다 구로다는 팀의 에이스 사사오카 신지를 스승처럼 모시면서, 그의 모든 노하우를 전수받았고, 스스로도 좀 더 나은 투수가 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2002년 구로다 히로키는 12승 8패 ERA 3.03, 13완투를 거두면서, 드디어 만개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구로다는 주목받게 됩니다. 

이후 구로다는 2020년 10승 2003년 13승을 거두면서 3년 연속 두자릿 수 10승 이상을 거두었고, 2004년에는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하여 일본의 동메달 획득에 기여하였습니다.

또한 2005년 15승 12패 ERA 3.17, 2006년 13승 6패 ERA 1.85를 기록하며 일본을 대표하는 특급 투수가 되어 갑니다. 

좋은 성적을 거둔 투수들은 모두 칭찬받아야 마땅하겠지만, 카프의 홈 구장 히로시마 시민구장은 일본에서 가장 작은 크기의 구장으로, 피홈런이 매우 나오는 타자 친화적 구장이었기 때문에 구로다의 히로시마 시절 성적은 더욱 더 경이로운 성적이었습니다. 

같이 타격으로 응수하면 되지 않느냐 생각할 수 있겠지만, 구로다의 소속팀은 역대 최악의 암흑기를 걷는 최약체 히로시마였기 때문에 언제나 득점 지원은 상상이하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히로시마 팬들은 이런 구로다의 특급 활약에 기쁘기도 하면서 슬프기도 했습니다. 

가난한 구단 사정상 시즌을 마치고 구로다가 FA로 이적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실제로 초특급 투수로 성장한 구로다에게 일본 명문팀을 비롯하여, 메이저리그에서도 오퍼가 밀려오기 시작합니다.

아무리 옛 정을 생각해서 낳고 길러준 친정팀 히로시마에 남고 싶어도 요미우리에서 제시한 4년 40억엔에 비해서 히로시마가 제시한 금액은 4년 10억엔, 그리고 언제가 될 지 모를 추후 감독직 제안이라는 초라한 조건 뿐이었습니다. 

히로시마 팬들은 그런 구단의 사정을 오히려 부끄러워하며 슬프지만, 구로다를 보내주기로 합니다. 그리고 2006년 10월 16일 구로다 히로키의 마지막 선발 등판 날이 다가오게 됩니다. 팬들은 오늘을 마지막으로 떠나는 팀의 에이스 구로다 히로키를 목 놓아 응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팬들이 한 자 한 자 정성껏 적은 대평 플래카드가 펄럭입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우리는 함께 싸워왔다.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미래에 빛나는 그날까지 그대가 눈물을 흘린다면
그대의 눈물이 되어주리."

카프의 에이스 구로다 히로키

그리고 며칠 후, 프로의 세계에서 있을 수가 없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팬들의 감동적인 작별 인사는 인간 구로다 히로키의 마음을 움직였고, 구로다는 FA를 철회하고 히로시마와 4년간 12억엔, 그리고 메이저리그 진출시 언제든 보내준다는 조건의 계약을 체결합니다. 

2002년 어머니에 이어서 아버지마저 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겪었음에도 구로다는 히로시마에서 2007년 12승 8패 ERA 3.56이라는 성적을 기록하고 2008년 LA 다저스와 3년 3,530만 달러에 계약하면서 메이저리그에 도전장을 던집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진출한 마쓰자카와 달리 메이저리그에서 구로다의 활약을 예상하는 사람은 비교적 적었습니다. 33살이라는 많은 나이, 빠르지 않은 구속, 구로다 히로키는 메이저리그의 강타자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에 대한 염려가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구로다는 보란듯이 2008년 9승 10패 ERA 3.73을 기록하며 성공적으로 메이저리그에 안착하게 됩니다.

이후 2009년 8승 7패 ERA 3.76, 2010년 11승 13패 ERA 3.39, 2011년 13승 16패 ERA 3.07 이라는 좋은 성적을 거두게 되면서 승운은 따르지 않았지만, 3점대 초중반의 평균자책점을 꾸준히 찍어주며 커쇼에 이어 LA다져스의 2선발 역할을 하며 구로다 히로키는 성공가도를 달리게 됩니다. 

2012년엔 다저스를 떠나 1년 1000만 달러에 양키스로 팀을 옮기게 됩니다. 2012년 16승 11패 ERA 3.32, 2013년 11승 13패 ERA 3.31, 2014년 11승 9패 ERA 3.71을 기록하면서 메이저리그 7년 연속 ERA 3점대를 거두는 엄청난 성적을 남기게 됩니다. 

그리고 양키스의 계약 종료를 앞우고 있을 때, 수많은 팀이 거액의 연봉과 계약금을 제시하며 구로다에게 러브콜을 보냈었지만, 구로다가 선택한 팀은 바로 친정팀 히로시마 도요카프 였습니다. 

메이저리그의 200억 제안을 포기하고 45억의 히로시마와 계약한 구로다히로키는 예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말은 아래와 같습니다.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은 카프 덕택이다. 
언젠가는 돌아가서 보답하고 싶다.
일본에 돌아간다면 카프밖에 없다.
돌아간다면 힘이 있을 때 돌아가고 싶다."

그가 복귀한다고 하자 히로시마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시즌권 8,300장이 그 자리에서 매진이 되었고, 히로시마현 현수막 제작업체들은 연말 휴가를 반납하고 거리를 가득 채울 구로다 히로키의 복귀 기념 현수막을 제작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2015년 3월 29일 구로다는 야쿠르트와의 복귀전에서 7이닝 5피안타 5탈삼진 무실점으로 팀의 승리를 이끌게 되었고, 히로시마현에서 이날 경기 최고 시청률은 65.8%를 기록하였다고 합니다. 

시즌성적 11승 8패 ERA 2.55를 기록하고 은퇴할 것으로 예상되었던 구로다는 히로시마와 6억엔에 재계약을 하게 되면서 1년 더 히로시마와 함께하기로 합니다. 

가난한 구단이었던 히로시마는 구로다에게 마지막으로 일본 프로야구 최고의 연봉을 선사하게 됩니다. 22살에 히로시마에서 프로생활을 시작한 청년 구로다는 42살의 백전노장이 되어있었습니다. 

구로다와 히로시마에게 히로시마의 우승과 구로다 개인 미, 일 통산 200승이었습니다.

구로다는 7월 23일 7이닝 무실점 호투를 보이면서 드디어 미,일통산 200승을 달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9월 10일 구로다는 요미우리와의 원정 경기에서 승리투수가 되면서 자신의 손으로 히로시마의 25년 만의 센트럴리그 우승을 결정 짓습니다. 

일본 시리즈에선 아깝게 니혼햄에게 2승4패로 패배를 하면서 일본 시리즈 우승은 거두지 못했지만, 구로다 히로키는 히로시마에서 열린 리그 우승 퍼레이드에서 시민에게 열열한 환호를 받으면서 빛나는 선수 생활을 마감할 수 있었습니다. 

구로다 히로키의 통산 성적은 일본 13시즌 2,021이닝 124승 105패 ERA 3.55이며 메이저리그 7시즌 1,319이닝 79승 79패 ERA 3.45였습니다. 매이저리그를 생활을 정리하고, 꿈을 이루러 일본에 복귀한다는 말에 의아해하는 기자에게 구로다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제가 양키스에서 뛸 때 제 딸들은 양키스 경기를 보며, 저에 모든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스포츠 선수는 아이의 정신과 사고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에 프로야구선수들은 모범을 보이며 아이들에게 꿈을 주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지금까지 히로시마 팬들에게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도전한 메이저리그에서 대 성공을 거둔 후 여러 구단에서 엄청난 금액의 제안을 모두 거부하고 팬들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히로시마로 돌아와 화려하게 선수생활을 마무리한 진정한 사나이 구로다 히로키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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